
이야기
열일곱에 끌려간 조선 청년이, 싱가포르에서 일본의 전범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가 갇혔던 감옥 옆, 포로들이 닦은 활주로 위에는 지금 싱가포르에 가면 누구나 내리는 창이 공항이 있습니다. 일본군에 끌려간 조선 청년은 왜 일본의 전범이 됐을까요.
포로 10만 명을 가둘 곳
1936년 영국은 싱가포르 동쪽 끝 창이에 새 감옥을 지었습니다. 바로 옆에는 영국군 막사가 있었습니다. 1942년 2월 싱가포르가 함락되자(3편 포트캐닝의 그 항복입니다) 일본은 한꺼번에 생긴 포로 10만 명을 가둘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비어 버린 영국군 막사에 포로 5만 명을, 감옥에 적국 민간인 3천 명을 몰아넣었습니다. 창이는 포로수용소의 다른 이름이 됐습니다.

1942년 8월, 탈출했다 붙잡힌 포로 넷이 나오자 일본군은 '탈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내밀었습니다. 포로 1만 7천 명이 거부하자 일본군은 그들을 셀라랑 막사의 연병장 하나에 몰아넣었습니다. 물은 수도꼭지 하나였습니다. 이질이 번지고 붙잡힌 넷이 처형되자, 닷새 만에 지휘관들은 서명에 동의했습니다.

지킬 병력이 모자라자, 조선 청년을
일본에게 포로는 너무 많았고 지킬 병력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의 청년 약 3천 명을 군속 포로감시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전남 보성의 열일곱 살 이학래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가 간 곳은 태국의 정글이었습니다.
바닷길이 연합군 잠수함에 막히자 일본은 버마 전선까지 철도를 놓기로 했습니다. 창이의 포로들도 그 공사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굶주림과 콜레라 속에 공사를 서두르면서 포로 1만 2천여 명이 죽었고, 끌려온 아시아인 노동자는 훨씬 더 많이 죽었습니다. 창이에 남은 포로들은 일본군 비행장 활주로를 닦았습니다.

포로가 매일 본 얼굴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번에는 일본군이 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포로들이 매일 마주한 얼굴은 장교가 아니라 감시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인 감시원들도 일본군의 일원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1947년 싱가포르의 호주군 법정은 이학래에게 교수형을 선고했습니다. 철도 공사장에서 아픈 포로들을 학대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는 창이 감옥 사형수 감방에서 8개월을 보내며 동료 조선인이 처형되는 것을 봤고, 징역 20년으로 감형됐습니다. 조선인 148명이 그렇게 일본의 전범이 됐습니다.
국적을 잃고도, 일본의 전범으로
1951년 그는 도쿄 스가모 형무소로 옮겨졌습니다. 이듬해 강화조약으로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잃었지만, 형기는 일본 전범으로 다 채워야 했습니다. 1956년 풀려났을 때 일본은 이번엔 일본인이 아니라며 보상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에서는 일본에 부역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는 일본에 남았습니다. 이학래는 평생 일본에 보상을 요구했고, 1999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조선인 전범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는 2021년 끝내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로들의 활주로, 창이 공항으로
그 사이 포로들이 닦은 활주로는 영국 공군 기지가 됐습니다. 1975년 도심의 파야레바 공항이 꽉 차자 싱가포르는 창이 기지를 새 공항 자리로 골랐고, 1981년 그 활주로 위에 창이 공항이 문을 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옛 창이 감옥은 2004년 헐렸습니다. 남은 건 정문과 담장, 망루 두 개뿐입니다. 근처의 창이 박물관에는 포로들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루 10만 명 넘게 내리는 그 땅은, 누군가에게는 끝나지 않은 전쟁터였습니다.


싱가포르 특집 3편 포트캐닝에서 항복한 10만 명의 포로가 향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