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주인은 600년 동안 늘 이 언덕 위에 있었다

포트캐닝 힐 · 항구를 내려다보는 자가 다스린 언덕 — 왕궁, 총독 관저, 공포가 쌓은 요새, 항복이 결정된 지하 벙커

싱가포르를 다스린 자는 600년 동안 늘 이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처음 땅속으로 숨었을 때, 싱가포르는 항복했습니다.
포트캐닝 요새 대문 — 1907년 요새를 헐 때 유일하게 남긴 부분
포트캐닝 요새 대문 — 1907년 요새를 헐 때 유일하게 남긴 부분
출처: Roberto Arias, Wikimedia Commons, CC BY 2.0

이야기

싱가포르를 다스린 자는, 600년 동안 늘 이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왕이 살았고, 총독이 살았고, 마지막엔 이 언덕 아래에서 항복이 결정됐습니다. 싱가포르 도심 한복판, 싱가포르강 북쪽의 작은 언덕 포트캐닝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 이 언덕이었을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내려다보는 자리, 왕들의 '금지된 언덕'

14세기 싱가푸라 왕국의 왕들은 그래서 이 언덕에 궁을 지었습니다. 평민은 오를 수 없었고, 왕들이 이곳에 묻혔다는 말까지 돌면서 사람들은 이곳을 '금지된 언덕(부킷 라랑안)'이라 불렀습니다. 14세기 말 자바의 마자파힛 왕국이 쳐들어오자 마지막 왕은 말라카로 달아났습니다. 왕이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왕들의 혼령이 언덕에 남아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400년 동안 아무도 이 언덕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스칸다르 샤 사당(크라맛) — 마지막 왕을 기리는 자리
이스칸다르 샤 사당(크라맛) — 마지막 왕을 기리는 자리
출처: janebelindasmith, Wikimedia Commons, CC BY 2.0

같은 이유로, 영국도 이 언덕에

1819년 해협을 지킬 항구가 필요했던 영국이 이 섬에 들어왔습니다(그 사정은 센토사 편에서 다뤘습니다). 영국도 가장 먼저 이 언덕 꼭대기에 국기를 올렸습니다. 1822년 래플스는 현지인들이 꺼리던 이 언덕에 자기 집을 지었고, 이듬해 친구 마스든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여기서 죽거든 말레이 왕들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고 썼습니다. 언덕은 '총독의 언덕(Government Hill)'이 됐습니다. 래플스는 결국 영국에 묻혔습니다.

찰스 다이스가 그린 총독의 언덕(1846)
찰스 다이스가 그린 총독의 언덕(1846)
출처: Charles Andrew Dyce,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공포가 쌓은 요새, 금세 구식이 되다

1857년 인도에서 영국 지배에 맞선 대반란이 터지자, 싱가포르의 영국인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반란이 번지면 숨을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1859년 총독 관저를 허물고 이 언덕에 요새를 쌓았습니다. 바다에서 오는 공격을 막고 시가지 치안을 살피며, 위급할 땐 유럽인들이 피신할 요새였습니다. 이름은 당시 인도 총독 찰스 캐닝의 이름을 딴 포트캐닝입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철갑을 두른 증기 군함과 더 멀리 쏘는 새 대포(강선포)가 등장했습니다. 언덕 위의 구식 대포는 금세 쓸모없어졌고, 요새는 한 번도 전투를 치르지 않은 채 1907년 대문과 일부 구조물만 남기고 헐렸습니다.

요새의 비상 출입구(Sally Port)
요새의 비상 출입구(Sally Port)
출처: Wikimedia Commons, Copyrighted free use
1902년의 포트캐닝 언덕
1902년의 포트캐닝 언덕
출처: Aldwin Teo,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폭격기의 시대, 땅속으로

그래도 내려다보는 자리는 그대로였습니다. 1920년대 언덕에는 영국군 말라야 사령부가 들어섰습니다. 1928년에는 저수지 공사 중 14세기의 금 장신구가 나와 '왕들의 언덕' 전설에 처음으로 증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하늘이 문제였습니다. 폭격기의 시대가 오자, 1930년대 후반 언덕 9미터 아래에 폭격에도 버티는 지하 벙커를 팠습니다. 훗날 '배틀박스(Battlebox)'라 불리는 곳입니다.

1942년 2월 15일, 땅속의 항복

1942년 2월 일본군이 싱가포르로 밀려들고 폭격이 쏟아지자 영국군 지휘부는 이 벙커로 내려갔습니다. 600년 동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던 권력이, 처음으로 땅속으로 숨은 것입니다. 2월 15일 아침 벙커 회의실에 장군들이 모였습니다. 저수지는 일본군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폭격에 터진 수도관으로 물이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백만 명이 몰린 시가지에서는 민간인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반격할 힘도 없었습니다. 퍼시벌 장군은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결정에 걸린 시간은 15분 남짓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날 저녁 싱가포르는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 10만 명이 넘는 영국군이 한꺼번에 포로가 됐습니다. 처칠이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라 부른 항복입니다. 이 포로들 가운데 많은 수가 동쪽 끝 창이로 끌려갔습니다.

잊힌 벙커, 다시 문을 열다

전쟁이 끝난 뒤 벙커는 입구가 막혔고, 그 위치마저 잊혔습니다. 1988년 한 기자가 잊힌 벙커를 다시 찾아냈고, 벙커는 항복 55주년인 1997년 2월 15일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배틀박스 입구
배틀박스 입구
출처: Zawed,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지금 이 자리

항복이 결정된 그 회의실에는 지금 그날의 장군들이 밀랍 인형으로 앉아 있습니다. 언덕 한쪽에는 600년 전 마지막 왕을 기리는 사당이 지금도 남아 있고, 요새 대문과 등대, 옛 영국군 막사였던 포트캐닝 센터가 공원 곳곳에 서 있습니다. 왕과 총독과 장군의 언덕. 금지됐던 이 언덕을 이제는 누구나 오릅니다.

포트캐닝 등대(2022)
포트캐닝 등대(2022)
출처: Wzhkevin,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포트캐닝 그린 — 공원이 된 언덕
포트캐닝 그린 — 공원이 된 언덕
출처: Jacklee,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싱가포르 특집 1편 센토사, 2편 내셔널 갤러리 싱가포르와 함께, 같은 섬의 다른 자리에서 같은 시대를 기억하는 이야기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포트캐닝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1859년 언덕 위에 쌓은 요새에 당시 인도 총독 찰스 캐닝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 전에는 '총독의 언덕', 더 이전에는 '금지된 언덕'이라 불렸습니다.
배틀박스는 무엇인가요?
1930년대 후반 언덕 9미터 아래에 만든 영국군 지하 지휘 벙커입니다. 1942년 2월 15일 퍼시벌 장군이 이곳 회의실에서 항복을 결정했고, 1997년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왜 '금지된 언덕'이라 불렸나요?
14세기 싱가푸라 왕국의 왕들이 살았고 그들이 묻혔다고 전해져, 사람들이 함부로 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왕 이스칸다르 샤를 기리는 사당이 지금도 언덕에 있습니다.

같이 보면

출처

Wikipedia 'Fort Canning Hill', 'Battlebox', 'Fall of Singapore', 'Coastal fortifications of Singapore'; roots.gov.sg(포트캐닝 요새 유구); NLB Curiocity(래플스 편지); Anzac Portal. 사진: Wikimedia Commons(Charles Andrew Dyce 1846 퍼블릭 도메인, CC BY, CC BY-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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